eve - 지옥의 징조 - 5장. Crisis. 위기
| 21.01.27 12:00 | 조회수: 700


미하일은 밖에서 가리온을 기다렸다. 불의 사슬에 가득한 화염이 미하일의 무기까지 아른거렸다. 화끈한 화염 덕분에 늘 무기를 옆에 두었지만, 직접 쓰게 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여기에 알로켄의 피를 묻히겠구나!”

가리온은 말했다.

“그럼. 하지만 우선 카론이 부활하지 않도록 해야지.”

이 말로, 미하일은 가리온이 중간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미하일은 창을 들었다.

‘카론을 부활시키지 않겠다는 그 의지를. 너를 죽여서. 이 미하일이 완성시키겠다!’

그리고 조금은 녹슬었지만 아직 쌩쌩한 불의 사슬에 정착한 사람들을 옆에 세웠다.

“비록 이곳에 고립되어 살아왔지만, 뜻만은 잊지 않았소. 그렇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녹슬었지만, 아직은 날이 살아 있는 무기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그들도 미하일처럼 가리온을 기다렸다.

“자, 이제 역사에 우리 이름도 남겨 봅시다.”

가리온은 이곳을 떠나려니 어쩐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작은 나무 천막 집 문을 열기 직전까지 그러했다. 그런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그러나 미하일의 눈을 보고 가리온의 마음은 도로 닫혔다.

'미하일마저!'

세 번째였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미하일과 불의 사슬 사람들이 가리온을 노리고 있었다.

'내가 알로켄이라는 것을 알았나?'

가리온은 말 없이 미하일을 보았다. 안타깝고 아쉬웠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혹시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그 동안은 왜 나를 살려둔 것이지? '

"검을 들어라."

모두가 가리온을 주시한 가운데, 무기 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가리온은 도망치거나 양해를 구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가리온을 포위한 순간, 이미 미하일은 적이었다.

"화살을 쏘거나, 마법을 부리지는 않겠다. 공평하게 검으로 승부를 내겠다."

미하일이 말을 타고 앞으로 나섰다. 가리온은 코웃음 쳤다. 적이 된 마당에 어설픈 동정은 우스웠다.

"상관없다. 빨리 끝내자."

미하일은 쓴 표정이었다.

"자네와 이렇게 되다니 아쉽군."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나와 싸울 수 있겠는가?"

가리온은 검을 정수리 위로 놓고, 미하일을 향해 달렸다. 곧 검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퍼졌다.

에바는 뒤에서 천천히 지켜보았다. 불의 사슬까지 오느라고 얼굴과 몸이 다 얼어버렸다. 뜨거운 것은 입김뿐이었다. 파르카 신전에서 추위에 버텨온 전력이 있었지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정신력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불의 사슬에 오면, 가리온을 만날 수 있다. 그 생각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이렇게 무리해서 오지 않았다.

“그래. 여기까지 왔어.”

멀리, 집촌이 보였다. 화염에 타다 만, 짧고 소슬한 나무와 이계 생명체의 가죽을 간신히 엮어 만든 집들이었다. 집들은 불의 사슬의 열기 때문인지 꼭 불타는 것처럼 보였다. 에바도 그 열기에 현기증이 일었다. 그리고 유령처럼 집들 사이로, 말을 탄, 일련의 무리들이 보였다. 불에 번쩍번쩍, 붉게 타오르는 무기들을 든 저들이 누구인지 에바가 궁금하기도 잠시, 작은 집에서 익숙한 등을 가진 사람이 나왔다.

"가리온!"

에바의 가슴 속 열기인지, 불의 사슬에 가득 쌓인 열기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휘익 불어나왔다.

스스로 돌아섰지만, 다시 올 수 밖에 없었다. 복수의 빙곡에서 만난 여자는 접어두고, 에바는 가리온과 함께 하고 싶었다. 가리온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에바는 가리온이 알로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크 홀에서 비나엘르 파라이가 가리온에게 말했을 때, 에바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가리온은 어머니 디에네 비노쉬의 아들이었다.

“가리온….”

에바는 차가운 바람 속에서, 냉정히 생각해보았다. 돌아서서 여자로서의 자존심은 지킬 수 있었지만, 그것이 다였다. 자존심을 지킨 후에 남은 것은. 홀로 떨어질 자신이었다. 세상의 멸망에 이르고 있는 트리에스테의 흉흉한 징조들 속에서, 에바는 정말로 원하는 것을 알았다.

'할 수 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그와 함께이고 싶다!'

이 바람이 에바가 진정 원하는 것이었다.

에바는 달렸다. 이제 다시 가리온 곁에서 함께할 수 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복수의 빙곡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일이었다. 허름하지만, 데카론의 모습을 갖추고 있던 말을 탄 이가 가리온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에바는 너무도 놀라 서둘러 가리온을 향해 달려갔다.

잔바크 그레이와 파그노는 아무것도 모르고 천막에서 나오고 있었다.

"검 소리가 요란하군."

"그러게. 시끄럽네. 무슨 일이지?"

"우리 간다고 환송회라도 해주나?"

“그나저나, 우리가 여기서 떠나면 에바도 만나기 힘들어 지겠군.”

“그러게. 크레스포를 떠날 때 고레인씨에게 불의 사슬로 오라고 부탁해 놓기는 했지만,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으니….”

“여. 벌써 나왔나?”

헤이치 페드론과 룸바르트 겐조였다. 그들은 짐을 들고 있었다. 짐이랄 것이야 별로 없었지만, 그런대로 단출하게 싸서 나서는 길이었다. 이제 여기, 불의 사슬에 자리 잡은 이름도 없는 작은 마을을 떠나야 하는 때였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시끄럽군."

캄비라 바투와 쿠리오도 나왔다. 먼저 모인 사람들은 그들을 반겼다.

"뭐, 저기 가리온님이 있는 쪽에서 요란한 걸 보니, 송별식이라도 해주려는 모양이네."

"여기가 뜨끈한 마을이라서 그런지, 정이 가득하다니까."

"그게 아니에요."

타마라였다.

"타마라."

그러나 타마라는 나오기와 함께 무섭게 달려갔다.

"뭐야. 왜 그렇게 급해?"

"얼른. 가리온님이 위험해요."

타마라와 함께 나온 시에나도, 황급히 달려갔다.

"무슨 일이에요?"

뒤늦게 나온 시리엘과 칸은 짐 꾸러미를 나눠 들고 나왔다.

"일단 가보자. 그게 좋겠어."

심상치 않다고 여긴 룸바르트는 서둘러 달렸고, 일행이 뒤따랐다.

가리온은 검을 치켜들었다. 미하일이 말을 타고 검을 휘두르는 바람에 힘을 바짝 끌어 올려야 했다. 가리온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가리온만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미하일은 눌러 내리는 힘으로 버텼지만, 말이 가리온의 검기에 놀라 발길질을 했다. 그 바람에 미하일과 가리온이 휘청 뒤로 물렀다.

“하아….”

미하일은 가리온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밀리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그것은 실력 차이 때문이기도 했지만, 미하일에게는 가리온에게 남은 아쉬움이 있었다. 그 아쉬움에 미하일은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

“가리온. 난 자네를 좋게 생각했었네.”

“그래서?”

가리온은 믿었던 미하일이기에 더 큰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진실을 이야기해주게나.”

“지금에 와서 진실이 무슨 소용이 있지? 자네는 이미 내게 날을 들이밀었네.”

미하일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가리온이 막았다.

"이야앗!"

가리온은 검을 뒤로 뺐다가 크게 앞으로 내렸다. 미하일은 옆으로 비켜나려다 말에서 떨어졌다.

"미하일!"

불의 사슬, 사람들은 미하일을 소리쳐 불렀다.

미하일은 그들을 손짓으로 막았다.

"괜찮아."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미하일은 나이가 너무 많았고, 말에서 떨어졌다. 게다가, 겨드랑이에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가리온의 예리한 검이 스친 자국이었다. 미하일은 상처를 손으로 대강 가리고 일어섰다. 처음에는 상처 때문에 가슴을 펴지 못했지만, 곧 등도 곧게 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후우…. 후우…."

조금은 힘들어하는 모습이었지만, 가리온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요하기 시작한 불의 사슬 사람들은 점점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가리온에게 증오를 느꼈다. 미하일이 상처를 입은 채로 말에서 떨어다는 것 자체가 불의 사슬 사람들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하일!"

"잇. 이 놈이!"

그 때 사람들을 밀치고 타마라가 나타났다.

“멈춰!”

시에나를 앞지른 룸바르트는 타마라 옆에 서서 숨을 몰아 쉬었다. 시에나도 곧 도착했다. 룸바르트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갑자기 왜들 그래?"

사람들은 갑자기 입을 딱 다물었다.

가리온은 알로켄이다. 알로켄 가리온. 트리에스테 대륙을 멸망시킬 수도 있는 중간자다. 이 말을 밖으로 끄집어 내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누가 먼저 말할지 서로 눈치 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누군가 소리쳤다.

"너희들. 너희들 이 자와 같은 편이지?"

룸바르트는 얼굴을 찡그렸고, 시에나의 눈은 동그래졌다.

이것은 가리온의 일행 전체를 향해 던진 질문이었다. 가리온이 중간자임을 알고 있는 불의 사슬 사람들은 그들도 카론과 관련되어있는 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을 룸바르트가 알리 없었다.

“이봐. 진정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데카론이잖아?”

“말 돌리지마. 그런 뻔한 수법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지금 우리더러 데카론이 아니라고 하는 거야?”

“움직이지마! 이 소환사놈!”

“허허. 이것 보게. 왜 그래? 우리 다 같은 데카론이라고!”

“아니, 너희들은 틀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룸바르트는 불의 사슬 사람들을 다그쳤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알로켄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침내 가리온과 대적하고 있던 미하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간밤에 델카도르님에게서 전갈이 왔다.”

‘델카도르!’

미하일의 음성 하나하나에, 가리온은 온몸이 떨렸다.

시에나는 동그란 눈으로 가리온과 미하일을 번갈아 봤다. 타마라는 미하일을 노려 보았다.

“델카도르? 로아성의 델카도르를 말하는 것인가? 그는 옛날에도 우리를 아발론 섬으로 보내려고 했었지. 그래서. 뭐라고 전갈이 왔기에 이러는 것인가.”

달려와 상황을 주시하던 캄비라 바투가 물었다. 그의 옆에는 나머지 가리온의 일행이 함께였다. 모두 몹시 궁금한 눈초리였다.

“여기, 이 중에.”

미하일은 떨리는 눈으로 가리온을 보았다.

그 순간, 화살 하나가 화염을 뚫고 날아왔다.

“허억!”

갑작스런 소란에 놀란 말들이 이리저리 날뛰었다. 그 사이로 화살 꽂힌 가슴을 움켜쥐며 미하일이 무릎을 꿇었다.

“헉.”

화살은 연달아 날아왔다. 숨을 트이기도 전에, 계속해서 미하일의 몸뚱이에 화살이 꽂혔다. 그리고도 계속해서 화살이 쏟아졌다.

“누구야!”

가리온의 일행들은 재빨리 피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가장 놀란 것은 룸바르트였다.

“에바!”

룸바르트는 에바를 향해 달렸다. 그러나 룸바르트는 날아오는 화살에 맞지 않았다. 그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에바가 정확히, 가리온의 일행을 제외하고 화살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저 자는 이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거야.’

에바는 활을 어깨 밑으로 내리며, 호흡을 가라앉혔다.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룸바르트는 에바를 덥석 안았다. 에바는 바닥에 눕혀지는 미하일을 보며 말했다. 옆에 있던 타마라가 에바를 향해 인사를 하는 듯 했다. 그러나 에바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룸바르트. 가리온을 포위한, 적들을 왜 죽이지 않지?”

한 동안 에바를 멍하니 보던 룸바르트는 고개를 숙이고 팔을 풀어 에바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자꾸 웃음과 눈물이 함께 나왔다.

“크큭. 그래. 에바. 나의 에바가 확실하군.”

“비켜. 활을 쏘게.”

에바가 활을 많이 쏠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리온의 두려움에 떨던 남아 있던 불의 사슬 사람들은 천막 집으로 도망치더니 다시 나오지 않았다. 돌아온 에바를 환영할 새도 없이, 가리온의 일행은 불의 사슬을 서둘러 떠났다. 도움을 주었던 불의 사슬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었지만, 그 마음 만으로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렇게 일행은 엘타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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