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 - 지옥의 징조 - 6장. Kalizio Vacshu. 조부
| 21.01.27 12:00 | 조회수: 764


불의 사슬은 하이하프 설원만큼이나 길었다. 모두가 다시 모인, 가리온의 일행은 열기가 약간 약해지는 밤에만 이동했다. 그래도 처음 보는 이계의 생명체들과 끊임없이 부딪쳤고, 일행은 살아남는 것만을 상상하며 싸워나갔다. 일행들은 그러한 유대감에 만족하는 듯 했다.

“역시, 우리가 다같이 있으면 못할 일이 없어? 그렇지?”

“파그노. 당연한 소리 좀 그만해.”

하지만 가리온은 지금의 일행들과 다시 만나게 된 것이 그리 반갑지 않았다. 일부러 혼자 떠난 것이었다. 그렇지만 만나졌다. 분명히 이유가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중간자….”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또 우리를 버리고 떠나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죠?”

룸바르트와 파그노가 한 마디씩 했다. 가리온은 아니, 별일 아니야. 라고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알로켄과 관련된 사실은 가리온의 비밀이었다. 타마라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 했고, 에바도 알고 있었다. 에바는 다크 홀에서 비나엘르 파라이를 만났을 때 같이 들은 사이였다. 불의 사슬에서 가리온의 비밀이 폭로될 뻔 했을 때, 에바는 가리온을 도우기도 했다. 에바는 그렇게 돌아왔다.

‘이 중에 있는 것일까? 나와 함께, 같은 운명을 가진 중간자가?’

일행들의 얼굴이 유난히 세세하게 들어왔다.

‘여자? 남자? 세그날레? 바기족? 세지타?’

가리온은 머리 속으로 바루나에게 들었던 예언을 떠올렸다.

“헬리시타에서 태어난 자의 전언.”

가리온은 구슬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잠자코 있었다. 구슬 안에는 작은 구슬이 있었고 그 작은 구슬 안에 또 구슬이 있었다. 가리온은 구슬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장 작은 구슬 안에 누군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가리온의 느낌에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왜 그러고 있지….’

가리온은 다시 손으로 구슬을 감싸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이 반 쪽짜리 인간아!”

소리는 너무나 크게 울려서 가리온이 서 있는 땅까지 뒤흔들었다. 놀란 가리온은 몸을 웅크리고 귀를 틀어막았다.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귀를 막고 괴로워하는 가리온 앞에 돌연 은발의 여자가 지나갔다.

가리온은 구슬에서 눈을 떼어 바루나를 보았다.

“허엇!”

돌처럼 바싹 굳은 바루나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전에 파르카 신전에서 이런 꿈을 꾼 적이 있어….”

가리온에게 휙 강풍이 불어오더니 느닷없이 바루나의 집에 하얗고 긴 것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순간 땅이 흔들리며 굉음이 울렸다. 돌로 굳은 바루나의 눈이 가리온을 주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눈길 역시 이전에 경험한 것이었다.

“내게 와라!”

바루나의 목소리가 점차 굵게 변했다. 남자였다.

“나에게 와라!”

가리온은 지난번처럼 정신을 잃을까 두려웠다. 구슬에서 손을 떼려고 했지만, 뗄 수가 없었다. 구슬이 가리온을 침투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구슬 속에서 찰랑이던 회색 빛 액체들이 가리온의 팔, 목, 심장 가까이까지 파고 들었다.

어느 순간, 가리온은 다른 곳에 있었다. 가리온은 잠시 그대로 주변을 둘러 보았다. 본 적이 있다. 하얀 눈 먼지가 휘날리는 곳. 어두운 주위. 그리고 벌어진 나무.

"아니. 예전의 꿈과는… 달라."

가리온은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버드나무 가지를 닮은 종이들이 눈 앞에 가득 생겼다.

"이것들은 다 뭐지?"

가리온은 그 종이들을 스르르 눈가 옆으로 치웠다.

궁금했지만, 사실 그리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앞에 무엇이 있을지 그것이 더 궁금했다. 아니, 궁금했다기 보다는 확인하고 싶었다. 끊임없이 가리온을 부르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실제 하는지, 정말로 가리온을 부르는 것인지 틀림없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한 눈에 보였다. 수많은 망자들 틈에서 홀로 서 있는 자. 낯선 이질감으로 사람이 아닌, 알로켄임을 드러내는 묘한 분위기. 가리온은 자기도 모르게 그 이름을 불렀다.

"칼리지오 밧슈!"

눈을 잃은 가련한 망자들 사이에서 칼리지오 밧슈는 홀로 우두커니 있었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살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죽은 느낌도 아니었다. 싸늘하기만 한, 아련한 남색 눈동자.

그 때, 가리온은 칼리지오 밧슈가 누군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같게 생긴 것은 아니었다. 쉴새 없이 풍겨 나오는 분위기 탓인지 몰랐다. 어쨌든 가리온은 닮은 그 사람을 곧 찾아 냈다. 대륙의 여신, 비나엘르 파라이. 하얀 은발을 가진, 냉정하고 도도한 그 모습이 칼리지오 밧슈에게서도 베어 나왔다.

그렇게 칼리지오 밧슈와 비나엘르 파라이를 겹치다가, 가리온은 깨달았다. 꿈 속에 자꾸만 나왔던, 검을 든 은발의 여인. 그 여인이 비나엘르 파라이였다. 그리고, 여인이 든 검은!

"알로켄의 힘!"

가리온과 같은 힘.

“그렇다면 비나엘르 파라이…. 그도…. 알로켄! 알로켄족! 그래서 내가 알로켄이라는 것을 안 거야! 하지만 그렇다면, 비나엘르 파라이도 제 2의 그랜드 폴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인가?”

“중간자여! 너를 기다렸다!”

가리온은 다시 바루나의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칼리지오 밧슈!”

칼리지오 밧슈에게서 전해지는 차가운 기류가 가리온을 휩쌌다.

“나의 후손. 신과 사람 사이의 중간자여. 너를 기다렸다!”

가리온은 달아나고 싶었지만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중간자? 신과 사람?”

“후손이여. 또 다른 중간자와 함께 운명을 받아들여라.”

“운명? 무슨 운명? 또 있어?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건가?”

가리온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세월로 깊게 묻었어도 핏발선 눈동자에서 삭아 들지 않을 본성이 드러나니, 희생한 자가 내뿜고 있는 집념의 낙인을 피할 수 없으리라!”

차가운 입김이 사방에 가득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칼리지오 밧슈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는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해댔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가누기도 힘든 가리온에게 말의 의미를 곰곰이 짐작해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의 후손이 아니다.”

가리온은 칼리지오 밧슈의 후손임을 부정했다.

“내가 당신의 후손이라는 증거는 어디도 없어! 중간자가 뭔지, 알로켄이 뭔지 난 전혀 몰라! 나 가리온과 나의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는 카론 따위는 불러 내지 않는다!”

“천만에.”

칼리지오 밧슈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목소리에는 웃음이 베어 있었다.

“알게 될 거야.”

다음 순간 가리온이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 주위는 달라졌다.

망자들이 가득한 곳이 아닌,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는 곳.

그곳은 사막이었다.

바람이 불자 모래가 얼굴을 때렸다. 가리온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숨 한 번 내쉴 때마다 입술이 바짝 탔다. 그러나 덥지는 않았다. 찡그리며 눈을 뜬 가리온은 주위를 살폈다. 낮아 보이는 하늘과 금빛 구릉이 올록볼록 이어져 있었다.

“사막?”

다시 바람이 불었다. 가리온은 몸을 돌려 등으로 바람과 모래를 막았다. 눈을 뜨자 가리온의 앞에 거대한 신전이 보였다.

“뭐지?”

처음 보는 양식의 건물들이 즐비했지만,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사람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음울한 공기가 깔려 곧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조용함만이 존재했다.

그 때 멀리 누군가 보였다. 살아 있지 않으나, 살아 있는 그. 칼리지오 밧슈였다.

“칼리지오 밧슈.”

가리온은 그를 향해 모래를 헤치며 걸었다.

칼리지오 밧슈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었다. 이미 시간이 가까워졌기에 더 이상의 고민은 부질 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실현되기로 예정된 일이라면 칼리지오 밧슈가 이제와 할 수 있는 일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한 바를 제대로 풀어내는 것뿐이었다.

“나는. 기필코. 해낸다.”

칼리지오 밧슈는 중얼거렸다.

“빛보다 밝고 암흑보다 짙은 물길을 터라. 상계를 지키는 파수꾼의 노래, 이계 가는 뱃사공을 부르는 노래. 달 겹치듯 나란히 트리에스테에 울리니.”

칼리지오 밧슈는 이계의 문을 여는 노래를 불렀다. 의식의 시작이었다.

‘마지막에 모든 것을 건다!’

악의 신 세라피로 분장한 칼리지오 밧슈는 손잡은 다른 여섯 신의 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자신의 피를 제단에 뿌렸다. 또 다른 계약의 피, 운도 마조키에의 피도 그 위에 흩뿌렸다. 피는 미리 준비해둔 것이었다. 칼리지오 밧슈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아르카나 가까이, 대륙의 중심에 운도 마조키에를 보냈다.

곧 하늘에 천둥번개가 가득 찼다. 짙은 구름이 땅을 향해 내려왔다.

“이 땅에 있을 모두가 두렵겠구나.”

칼리지오 밧슈는 눈을 잠시 감았다. 가리온은 두려워 낮게 웅크렸다.

‘모두. 부탁한다…!’

칼리지오 밧슈는 이윽고 마지막 말을 읊었다.

“계약으로 엮인 피가 출렁이리.”

“뭐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가리온은 똑똑히 들었다.

“알로켄과 사람의 중간자. 칼리지오 밧슈. 사람과 이계의 중간자. 운도 마조키에. 모든 조화로운 것들의 대표자가. 코스모스와 카오스! 차원의 문을 피로써 열리!”

칼리지오 밧슈의 말이 끝나자, 대륙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리온의 머리 속은 또렷했다.

“…. 운도 마조키에?”

많이 들었던 이름이다. 가리온은 입으로 몇 번,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마침내 그가 누군지 알았다. 모를 리가 없었다. 가리온은 기사들의 땅, 제노아 출신이었다.

“전설의 기사, 운도 마조키에?”

가리온은 어리둥절했다. 보이는 것은 칼리지오 밧슈 뿐이었다. 가리온은 칼리지오 밧슈, 더 가까이 가서 보고 싶었다. 눈 앞에 있던 사막이 쩍 갈라졌다. 아름답게 보였던 건물까지도 반으로 조각이 날 듯싶었다. 가리온은 땅이 벌어진 데를 건너 뛰려고 했다.

“안돼!”

가리온은 붕 떴다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크레스포 바루나의 집이었다. 놀라서 바루나를 쳐다보았다. 바루나는 호흡이 곤란한지 얼굴이 창백했고 식은땀을 흘렸다.

“칼리지오 밧슈와 운도 마조키에를 봤지?”

가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됐어. 휴. 잘됐군. 이제 끝났어.”

바루나는 온 몸의 기운을 다 쓴 것처럼 보였다.

“이제 그랜드 폴이 시작돼. 그렇게 되면, 나는 너처럼 버틸 수 없어.”

가리온은 말없이 바루나를 보았다.

“예전에 있었던 그랜드 폴 말이야.”

가리온은 조용히 물었다.

“…. 그 사막은 어디지?”

“알고 싶어?”

가리온은 끄덕였다. 바루나는 한참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바라트. 정확히는 오렌다 사막이지만. 건물이 있는 곳은 바라트야.”

가리온의 생각이 끝날 때쯤, 일행은 엘타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아.”

바다는, 저절로 그 내음을 맡게 되는 신비한 것이었다. 일행들은 숨을 크게 쉬어 바다를 들이마셨다. 비릿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고생한 보람이 있는데?”

그렇게 통과하기 힘들다는 불의 사슬을 통과해 마침내 엘타에 다다른 일행에게, 바다는 달콤했다.

“이제 좀 쉴 수 있으려나?”

누군가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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