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 - 지옥의 징조 - 11장. Holy Water 2. 성스러운 물 2
| 21.01.27 12:00 | 조회수: 715


체력이 좋은데다가, 수영도 할 줄 아는 캄비라 바투가 성난 론도우의 파도에서 가리온의 일행들을 구출했다. 그 중 룸바르트는 수영을 할 줄 알았기 때문에 큰 상처가 없었다. 수영을 할 줄 안다 해도, 성난 파도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트리에스테 대륙이 이계에 오염된 상황에서 바다라고 이계에 오염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가리온의 일행이 전부 무사한 것은 행운이었고 기적이었다. 두 마리의 그리폰은 바람 속에서 나타나질 못하다가 시에나와 캄비라 바투의 흔적을 알고 날아와 주었다. 그들은 오염되지 않은 물고기들을 가리온의 일행에게 구해다 주었다.

가리온은 시간이 더 지체되기 전에 바라트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슈마트라 초이, 아버지가 잡혀 있다는 피톤 성도 가고 싶었다. 가리온은 두 곳 중 어디로 갈지 선택해야 했다. 선택해야 하는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지금 일행들을 어떻게 해야 할 지도 가리온에게는 어려운 문제였다.

“….”

쉽게 말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야기하자고, 결론을 내자고 모인 자리도 아니었거니와 그 일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어려운 시점이었다. 가리온은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리라 생각하며 뭐라고 대답할지 생각해 보았다. 일행들이 더 이상 가리온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할 경우가 대답하기 가장 쉬웠다. 결과가 어찌되었든 가리온은 혼자서라도 계속 나아갈 것이다. 그것이 바라트가 될지 피톤성이 될지 아직 마음을 정하지는 못했지만. 가리온은 아무래도 일행들이 이 결과를 택할 것 같았다. 가리온과 함께 계속 가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 여행하면서 그들의 우정을 보았지만, 엘타에서 우정은 산산조각 났다.

‘당연한 일이야.’

가리온은 이렇게 된 것에 가슴 아팠지만,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안정을 찾는 것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아주 기대하지는 않았다. 자신과 함께 해줄 누군가. 가리온은 이제껏 필요 없다고 했던 그들의 존재가 얼마나 자신에게 소중했는지 깨달았다.

"가지."

침묵을 참다 못한 룸바르트가 말을 꺼냈다. 가리온뿐 아니라 모두가 룸바르트를 뚫어지게 보았다.

“뭐? 그럼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잔바크 그레이는 룸바르트의 말이 맞는 것을 알았지만 이대로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가리온을 힐끗 가리키며 말했다.

“함께 갈 수 없네.”

마음을 닫은 잔바크 그레이는 입을 꾹 닫아버리고 돌아 앉았다. 또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한참 만에 말문을 트인 것은 룸바르트였다.

“그렇지만. 나는 가리온과 함께 갈 건데?”

잔바크 그레이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룸바르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위험한 신분을 가진 가리온을 받아들이려는 룸바르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계속 함께 갈 거예요.”

타마라는 가리온과 룸바르트 편에 섰다.

“시에나. 갈 거지?”

캄비라 바투는 먼저 시에나에게 물었다.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던 터였다. 시에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쿠리오에게 눈길을 돌렸다. 캄비라 바투가 채 묻기도 전에 쿠리오는 말했다.

“캄비라 바투님이 가신다면, 저도 갑니다.”

캄비라 바투와 쿠리오는 굳은 눈빛을 교환하였다.

“여기 셋은, 가리온과 함께 가겠다.”

캄비라 바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파그노는 머릿수를 헤아려 보았다. 가리온까지 해서, 여섯 명. 절반이 가리온의 편에 섰다. 헤이치 페드론과 시리엘은 가리온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잔바크 그레이와 파그노는 제노아의 명예를 걸고 있었다. 칸은 자신이 하자는 대로 할 것이었다. 이렇게 다섯 명. 그리고 또 한 명.

“에바? 어느 쪽으로 갈 텐가?”

파그노가 불쑥 물었다. 에바는 말없이 행동으로 답변했다. 에바는 언제나 그렇듯이 가리온 뒤에 섰다. 표정은 변하지도 않았다. 에바는 점점 더 세지타스러워지고 있었다.

“일곱 대 다섯. 정신 나간 사람이 꽤 많았군.”

파그노는 관조적으로 중얼거렸다.

“편을 가르는 것은 우스운 일이네.”

캄비라 바투가 말했지만, 파그노는 코웃음 쳤다.

“길을 아는 것은 나뿐인 것 같은데. 따로 갈 생각인가?”

“더 이상 동참할 수 없다.”

잔바크 그레이는 짧게 대답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트리에스테 대륙에 재앙을 몰고 올 생각이 없네. 평화를 위해 함께 싸울 생각은 없는가?”

가리온은 힘겹게 말했다. 어떤 말을 해도 기사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다른 사람들도 아닌 한 고향 제노아, 다 같은 기사들이었다.

“….”

잔바크 그레이를 더불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고집불통들이군. 우리는 가세.”

룸바르트는 혀를 차며 먼저 길을 나섰다. 캄비라 바투와 쿠리오는 시에나의 어깨를 돌려 뒤를 따랐다. 타마라도 등을 돌렸다.

“…. 함께 가세!”

가리온은 마지막으로 힘주어 말했다.

“….”

그러나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남은 사람들 모두가 가리온을 외면했다.

“후….”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가리온은 천천히 돌아섰다. 에바도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조용히 가리온을 따랐다. 한발자국, 한발자국이 무거운 가리온은 터덜터덜 걸었다.

“이쪽이네.”

룸바르트가 가리온을 확인하며 앞길을 안내했다. 그렇게 가리온은 해안을 떠났다.

가리온의 모습이 흐릿해질 무렵, 잔바크 그레이가 외쳤다.

“조심하시오! 이제 우리는 적이오! 군대를 만들어 당신을 죽이러 가겠소!”

“잔바크….”

칸이 나지막하게 잔바크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도 가세.”

잔바크 그레이와 더불어 파그노와 칸이 뭉쳤다.

“같이 가겠소?”

헤이치 페드론과 시리엘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일단 여기서 빠져 나가세.”

곧 그들도 자리를 떠났다.

룸바르트의 말대로 해안에서 숲으로 들어가자 작은 호수가 나왔다. 사실 작다고 할 수 없는 크기의 호수였지만, 방금 전 가리온의 일행들이 경험한 바다가 워낙 컸기에 더욱 작게 느껴진 것이었다.

“예전엔 더 컸는데.”

룸바르트는 호수 주위를 다가서며 말했다. 허리까지 오는 길고 푸른, 이름 모를 잡초들이 무성했다. 그러나 두려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햇살이 드는 곳이 많지 않았지만 따스했고, 조용했지만 적막하지 않았다.

“이곳에 오니 어쩐지 눈이 맑아지는 것 같군.”

쿠리오는 캄비라 바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만지작거렸다. 요정의 호수는 그야말로 신선하고 상쾌했다. 방금 전 해안가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아니 가리온에게만은 그렇지 못했다. 가리온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시원했지만, 어느 새 트리에스테 대륙과 이계, 자신의 운명이 다시 답답하게 차 올랐다.

“트리에스테에 이렇게 오염되지 않은 곳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군.”

가리온의 말에 룸바르트는 손을 내저었다.

“자네, 눈이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중요하고 은밀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이 숲은 이렇게 평온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

룸바르트는 가리온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았다.

“잘 살펴봐. 곳곳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이곳은 오염이 되지 않은 곳이 아니라, 오염이 되지 못한 곳이야. 다시 말해서, 악마들이 슬금슬금 기어오려 해봐도 그럴 수 없는 곳이라 이거지. 먼저 이곳을 잡은 무리들이 있거든.”

“요정들!”

타마라가 웃으며 룸바르트의 말에 장단을 맞추었다.

“근데, 타마라 괜찮은 거야?”

“뭐가요?”

“뭐라니. 타마라도 사악하잖아.”

룸바르트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정확한 지적이었다. 타마라는 세그날레, 이계에서 온 암살자였다. 타마라는 미소를 거두지 않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우리 세그날레들은 인카르 교단과 계약했어요. 그래서 원하는 어느 곳이나 갈 수 있죠.”

이렇게 말했지만, 타마라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사실 타마라도 요정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요정들이 나서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 뻔했다.

“요정들은 어떻게 생겼죠?”

시에나는 룸바르트에게 물었다. 잔잔한 요정의 호수는 고여 있는 물처럼 보이기도 했고, 유유히 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호수는 하늘색으로 깨끗했지만 안에는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맞춰봐. 어떻게 생겼을지.”

시에나에게 농담을 건네는 룸바르트를, 에바는 말없이 힐끗 보았다.

“요정이,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래. 그리고 그들은 사납지. 아마 모르긴 해도, 우리를 적으로 생각한다면 카론만큼 악을 쓰고 죽이려 들걸.”

캄비라 바투는 룸바르트가 쓸데 없는 소리만 늘어놓는다고 생각했는지, 룸바르트와 시에나 사이에 섰다. 그래도 룸바르트는 말을 계속 했다.

“배에서 당신이 정신을 잃었을 때, 뿌린 가루는 여기서 얻은 것이지.”

“가루?”

“그래. 보기에는 그냥 호수 같아도. 여기 물을 그릇에 담아 햇볕에 말리면, 가루만 남지. 반짝이고 씁쓰름한 가루가 말이야. 당신은 알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흑마법의 부작용을 완치할 수는 없어도. 완화할 수 있어. 당신 상처에도 괜찮은 것 같더군.”

시에나는 룸바르트를 또렷이 보았다.

“… 정말 그랬어요?”

“이곳에서 너무 지체하고 있는 것 아니에요?”

타마라가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간다구. 가.”

룸바르트는 타마라에게 먼저 대답하였다. 그리고 나서 시에나를 향했다. “정말이야. 거짓말 할 필요도 없잖아. 하지만, 함부로 건드리지는 말게. 당신한테는 내 것을 부면 되니까.”

말을 마친 룸바르트는 길 안내를 하기 위해 앞으로 달려갔다.

‘요정의 호수…. 상처….’

시에나는 슬며시 팔을 잡았다. 검은 흉터는 여전히 있었다. 시에나는 그 상태로 한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캄비라 바투가 부를 때까지 계속 그 상태였다.

“가지.”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나서는 듯 했다.

“잠시만.”

“…?”

“먼저 가세요.”

“위험한데.”

“잠시면 되요. 오래 걸리지 않아요.”

캄비라 바투는 시에나를 한 번 보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가리온과 다른 일행들은 호수를 넘어서고 있었다.

“서두르시오.”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캄비라 바투의 모습이 멀리 시에나만큼 작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확인해 보자.’

시에나는 호수 쪽으로 몸을 숙이고 손을 앞으로 뻗었다.

“죽는다.”

소스라치게 놀란 시에나는 벌떡 일어나려다 기우뚱했다. 그러나 곧 바로 섰다. 허리까지 올라오던 이름 모를 풀들이 시에나를 잡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시에나는 목소리가 들렸던 곳으로 돌아 보았다.

“세상에!”

늘 차분한 시에나는 놀라고 말았다. 꼭 타마라 같이 꽉 짜인 얼굴, 벌거벗은 상체, 눈부신 금발, 뾰족한 귀, 그리고 동물의 하체. 그러한 것들이 수십, 수백 마리는 모인 것 같았다.

“…. 요정…. 이군요!”

가장 가까이 있던 요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나는. 저 물이 필요해요.”

시에나는 또박또박 말하려 애썼다.

“왜?”

요정은 시에나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시에나는 더 갈 곳이 없어서 겁 먹은 표정으로 주춤거렸다.

“가… 가까이 오지 마요.”

시에나는 마법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시에나의 무기였다. 그러나 머리 속이 하얗게 비워진 듯 아무런 주문도 떠오르지 않았다. 요정의 눈동자는 하얀색이었다. 인간과는 반대였다. 검은색 자위, 그리고 하얀색 눈동자. 시에나는 그 기괴한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요정은 그 눈으로 시에나를 이곳 저곳 훑어 보았다.

“당신은 우리의 보물이 필요 할만 하군.”

시에나는 잠자코 요정이 하는 말을 들었다.

“특별해. 당신은.”

요정은 휙, 시에나에게서 돌아섰다.

“그러나 우리의 호수를 건드리면 죽는다.”

“…. 건드리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필요해요…!”

시에나는 용기를 내서 외쳤다. 상처가 어쩐지 쑤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호수에서 나오는 가루가 더욱 절실해졌다.

“이것?”

요정은 작은 병을 내밀었다. 시에나는 당장 그 병을 잡고 싶었지만 참았다. 섣불리 나서면 안 되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자격을 얻어라.”

요정의 말이 끝나자 병은 공중으로 솟아 올랐다. 그리고 그 아래, 땅을 요정들이 메웠다. 시에나는 그냥은 병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제는 시에나가 알고 있는 마법의 주문들이 머리 속에 가득 떠올랐다.

‘요정들은 전혀 움직일 기미가 없어… 내가 공중을 날 수 없으니까, 한 곳을 지키는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마구 공격해버리면 병이 깨질지도 몰라….’

시에나는 침착 하려고 노력했다. 기억을 더듬어, 새겨진 모든 주문들을 훑어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방법을 찾았다.

‘그래! 그 방법이라면! 한 번, 해보자!’

시에나는 뒤에 호수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한 발 전진했다. 하얀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 요정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움직이지 않기에 시에나는 한 발 또 전진했다. 그러나 그냥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시에나의 입술은 주문을 완성하고 있었다.

“불행의 쾌락을 선사하는 세라피에게 비극을 청하노니! 엘리멘터들이여! 나와 함께 진홍빛 나락을! 지금 이곳에 집중케 하라! 브 브라이머!“

그것은 듀스 마블이 딱 한 번, 루앙 광장에서 썼던 마법이었다. 슈마트라 초이의 사죄의식을 거행하던 날, 듀스 마블이 흑마법사임을 드러낸 바로 그 마법이었다. 시에나는 기억을 더듬어 그 마법을 행한 것이었다. 요정의 호수가 들썩거렸다. 땅에서 해골의 머리가 솟았다.

“성스러운 곳에서 무슨 짓이냐!”

병을 공중에 띄웠던 요정이 사납게 외쳤다. 그러나 시에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땅에서 솟아나는 스켈리톤들이 시에나에게는 고마울 뿐이었다. 요정들은 이계의 힘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 스켈리톤 들을 발로 밟았다. 그들의 다리 힘은 거대한 짐승의 힘과도 같아서 땅이 쑥쑥 들어갔다. 그러나 스켈리톤은 죽지 않는 자들이었다. 뼈는 끊임없이 솟아오르려 노력했다.

휘익.

시에나는 틈을 타서 휘파람을 불었다. 하늘에 그림자가 드리워질 무렵, 시에나는 병을 향해 뛰었다. 바로 눈 앞에 병이 빙글 공중을 돌았다.

“너에게 자비를 베풀었건만, 너는 네 본성만큼이나 추악하구나!”

요정의 말에 시에나는 가슴이 아팠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병은 시에나의 손에 있었고,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그리폰이 시에나를 태우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시에나가 일행을 따라잡을 때쯤, 숲은 끝나가고 있었다.

“시에나가 늦는군요.”

쿠리오는 시에나를 걱정했지만, 캄비라 바투는 하늘을 재는 듯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곧 올 것이네.”

룸바르트는 가리온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 궁금했다.

“어찌할 건가? 엘타에서 배를 구한 건… 어디로 가려던 것 같은데… 페니키는 아닐 테고…. 음…. 바라트?”

가리온은 한 순간 움찔했다.

“내가 말했던 피톤 성은 어떻게 생각하나?”

슈마트라 초이를 생각하며 한 말이었다. 룸바르트는 슈마트라 초이에게 큰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관심이 가리온에게는 비수였다. 룸바르트가 콕콕 마음 속을 쑤실 때마다 가리온은 괴로웠다.

“자네가 소문이라고 했네.”

“그런 큰일은 소문이 사실인 법이지. 가서 확인해보지 않겠나?”

룸바르트는 피톤성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

숲이 끝나자, 산 아래 또 하나의 숲이 보였다. 그 숲 너머에는 도시가 있었다. 또 다른 항구도시, 페니키였다. 멀리 보이는 항구에는 배들이 다니고 있었다.

“저 중에 바라트로 가는 배도 있을 테지?”

“….”

“아버지를 구하러 가지 않을 생각인가?”

가리온은 참다못해 룸바르트를 쏘아 보았다. 누트 샤인이 바라트에서 무서운 일을 벌이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어쩐지 입으로 꺼내서는 안될 일 같았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일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피톤도 여기서 멀지는 않아.”

룸바르트는 재촉했다. 가리온도 선택해야만 하는 시간이 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가리온은 항구를 오가는 배를 보다가 북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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