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io - 의식 - 11장. Select. 선택
| 20.12.30 12:00 | 조회수: 887


“으아아!”

헤이치 페드론은 뒷걸음질을 치다 주저앉아 버렸다. 디에네 비노쉬는 공기를 흔드는 알 수 없는 소리와 헤이치 페드론의 비명소리에 놀란 채로 두리번거렸다. 무엇인가 흐릿하고 크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사…… 사…… 사스콰…… 치……!”

헤이치 페드론은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야 똑바로 말할 수 있었다.

“사스콰치가 나타났어요!”

“이럴 수가!”

디에네 비노쉬는 서둘러 고문실로 뛰어 들어갔다.

사스콰치는 슈마트라 초이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하얀 털이 듬성듬성 덮여있는 쩍쩍 갈라진 죽은 땅 같은 얼굴보다 훨씬 큰 주먹으로 계단을 쾅쾅 내려쳤다. 입술이 툭 튀어나오고 코가 움푹 꺼진 사스콰치의 얼굴은 답답한 듯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림자에서 빠져 나오면 지금 쌓인 분을 얼마나 격하게 풀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사스콰치를 등에 타서 조종하는 예타리안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룸바르트는 벽을 짚고 차차 뒤로 물러섰다. 헤이치 페드론은 룸바르트의 웃옷을 뒤에서 덥석 잡았다.

“자네 어쩌자고 이런 짓을 저질렀는가!”

“이상해.”

“룸바르트 빨리 여기서 피하세!”

헤이치 페드론이 외쳤지만 룸바르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이상해.”

“아니 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건가?”

“그냥 죽었어야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린가?”

“왜 죽질 않는 거지?”

룸바르트는 처절한 고통을 버티며 몸부림치는 슈마트라 초이를 두려움으로 쳐다보았다.

헤이치 페드론은 그제야 깨달았다. 사스콰치는 거대한 몸집 때문에 슈마트라 초이의 그림자에서 제대로 빠져 나오고 있지 못했다. 때문에 슈마트라 초이의 정신력이 받는 타격은 더욱 클 것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슈마트라 초이도 요쉬마처럼 숨을 거두어야 함을 의미했다.

하지만 슈마트라 초이는 입을 악물고 계속 고통을 참아냈다.

“요쉬마는 죽었는데…….”

“인간이 아냐.”

사스콰치와 슈마트라 초이의 모습에 넋을 잃은 룸바르트와 헤이치 페드론의 등 뒤로 디에네 비노쉬의 목소리가 울렸다.

“비켜요!”

소리 나는 곳으로 돌아보자 어느새 디에네 비노쉬가 석궁을 들고 사스콰치를 향해 겨냥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감각은 손상되어버렸지만 듣는 신경에서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활시위를 끌렀다. 꽤 녹이 슬고 낡은 것 같은 잿빛 석궁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튕겨졌다.

헤이치 페드론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순간, 사스콰치가 고통스러워하며 기우뚱했다. 인간이라면 심장이 있을 법한 자리를 약간 벗어난 위치에 꽂힌 화살 밑으로 붉은 피가 번져 내렸다.

끄릉!

사스콰치의 눈빛이 붉게 달아오르면서 둔중한 팔을 더욱 거세게 놀렸다. 좁고 가파른 계단은 곧 무너질 듯 흔들거리는 것 같았다. 헤이치 페드론은 벽을 잡으며 소리쳤다.

“한 번 더! 아직 죽지 않았어요!”

디에네 비노쉬는 다시 한 발을 더 쏘았다. 사방이 흔들렸지만, 디에네 비노쉬는 작은 떨림도 없는 모습이었다.

끄릉!

이번에는 목과 어깨 사이에 화살이 박혔다. 사스콰치는 괴로워하며 몸을 심하게 흔들었다. 덕분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슈마트라 초이의 그림자를 거의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자 사스콰치는 벽을 치기 시작했다.

“사, 사스콰치가! 그림자를 빠져 나오려고 해!”

“밀어요!”

디에네 비노쉬의 외침에 헤이치 페드론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 사스콰치를 밀었다. 듬성듬성 난 질척한 털에 손이 닿으면서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허억! 내, 내가!”

흔들거리던 사스콰치는 드디어 슈마트라 초이의 그림자에서 빠져 나와 계단을 굴렀다. 하지만 좁은 지하 계단에 비해 워낙 큰 몸이라 곧 멈추었다. 그럼에도 헤이치 페드론은 두려움과 놀람으로 감격했다.

“내가 밀었어!”

디에네 비노쉬는 석궁을 내던지고 옆에 두었던 검을 들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계단을 뛰어내려와 슈마트라 초이를 일으켰다.

“정신 차려요! 어서 정신 차려요!”

“하아.”

혼이 빠져버리는 것 같은 아찔한 고통에 괴로워하던 슈마트라 초이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디에네 비노쉬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아아.”

“힘들어도 일어나세요.”

디에네 비노쉬는 슈마트라 초이를 벽에 기대어 앉게 했다.

“으읏.”

“사스콰치가 아직 살아있어요. 이제 당신밖에 없어요.”

크릉-.

디에네 비노쉬는 슈마트라 초이의 손을 찾아 검을 쥐어주었다.

“후우.”

슈마트라 초이는 밋밋한 검을 잡아 보았다. 무척 가벼운 검이었다. 검이라기보다는 철이나 구리 따위를 섞어 만든 부지깽이 같기도 했다.

“크루어는 아니지만, 그게 제일 멀쩡했어요.”

볼품없고 작은 검이었지만 그만큼 무게가 덜 나가는 것이 어쩐지 슈마트라 초이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괜찮은 검이군.”

슈마트라 초이는 무릎부터 세우며 천천히 일어섰다.

“우아아아!”

똑바로 선 슈마트라 초이는 방금 전까지 쓰러져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고 빠르게, 그리고 힘 있게 달려 나갔다. 언제나 변함없이 뿜어져 나오는 하얀 빛이 몸을 돌리지 못하고 벽에 막혀버린 사스콰치를 사방으로 질러 내렸다.

그런 슈마트라 초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룸바르트의 머리 속은 하얗게 비어버렸다.

디에네 비노쉬는 룸바르트에게 다가갔다.

“늘 저 하얀 빛을 증오했죠. 순수한 기사가 아니라, 사악한 힘을 지닌 자라는 꼬리표가 붙을까 두려워했어요. 그렇게 자신이라는 존재를 한없이 탓하고 깎아 내리면서 가두어 온 사람이에요. 기사로서 큰일을 해내고 싶다. 그게 저 이의 마음이고 꿈이었어요. 그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제노아가 먼저였죠. …….”

디에네 비노쉬의 가슴에 겨울 같이 시리던 지난날이 스쳐갔다. 네오스를 떠나 인카르 신전에서 결혼식을 올리던 날부터 항상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던 가리온의 얼굴, 무뚝뚝한 듯 하면서도 언제나 가족을 지킨 슈마트라 초이의 단단한 어깨가 얼어붙은 눈을 녹이듯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아무리 정치상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가족이었다 할지라도 디에네 자신이 조금만 더 마음을 열었으면, 어쩌면, 어쩌면 지금의 상황까지는 이르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가슴을 죄었다.

“때문에 덫에 걸려든 거예요……. 티몬 겐조라는 서기관의 아들이죠? 저 이는 자신의 죄를 알고 있어요. 시간을 다시 돌려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겠지만, 용서를 빌겠어요. 진심으로. 진심으로 용서를 빌겠어요.” 디에네 비노쉬는 룸바르트의 손을 꼭 잡았다. 룸바르트는 말없이 고개를 벽으로 향했다.

슈마트라 초이의 날렵한 검 날에 의해 거꾸러진 사스콰치의 몸체 위로 작은 불을 밝히는 초의 농이 조금씩 떨어져 쌓였다. 사스콰치는 더 이상 발광하지 않았지만 통로에는 고약한 구린내가 지독하게 진동했다. 오염체의 사체에서만 나오는 특유의 냄새였다.

“으읏.”

불빛 끝에 주저앉은 슈마트라 초이는 끙 신음소리를 내더니 웃어 보였다.

“등뼈가 좀 나간 것 같군.”

“아, 제가 보겠습니다.”

헤이치 페드론이 치료를 하는 동안, 룸바르트는 슈마트라 초이에게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이유?”

“왜. 죽였습니까?”

룸바르트의 목소리는 다소 흔들렸지만, 방금 전보다는 현저하게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슈마트라 초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떼었다.

“자네, 제노아에 가 본 적이 있는가?”

끼익.

요란한 문소리가 나면서 고문관이 돌아왔다. 술 방울이 바닥에 똑똑 떨어지는 모양새가 성급하게 담아 온 듯 했다.

“이게 마지막이랍디다. 거, 쉬엄쉬엄 드십시오.”

고문관은 굽실거리며 룸바르트에게 술을 건넸다. 물론 고문관은 룸바르트가 입고 있는 최고급 옷감을 보고 절한 것이었다. 속으로는 젊은 놈이 술만 진탕 마셔댄다고 불평을 잔뜩 펼쳐놓고 있었다. 고문관은 룸바르트가 술을 받아 들자마자 얼른 창가로 쪼르르 뛰어갔다. 해가 짧은 계절이라 벌써 붉은 빛이 땅거미를 몰아올 기세를 하고 있었다.

“벌써 해가 이만큼이나 기울었네. 왜, 아직도 시작을 안 하지?”

고문관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더니 룸바르트에게 말을 걸었다.

“이야. 금세 사람이 또 늘었습니다. 아주 대단한 구경이 되나 봅니다. 크크큭.”

룸바르트는 고문관의 말은 한 귀로 흘려버리고 술을 한 숨에 들이키더니 슈마트라 초이를 향해 꼬부라진 혀로 말했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예?”

고문관이 룸바르트에게 굽실거리며 다가가는 순간, 뜨거운 노을빛이 문가에 쏟아졌다.

고문관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아무래도 빛은 익숙하지 않았다.

“누구요?”

주홍빛이 화려한 오클라스가 을씨년스러운 바람에 흩날렸다.

“아이고.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고문관은 얼른 슈마트라 초이와 디에네 비노쉬의 등에 꽂았던 바늘을 감추며 능청을 떨었다.

“아이고, 사제님. 준비는 아까부터 다 되어 있었습니다. 거, 이제 시작하는 겁니까?”

시에나는 대답하지 않고 슈마트라 초이와 디에네 비노쉬 가까이로 다가갔다. 덕지덕지 붙은 핏덩어리가 흉측했다.

“어떻게 이런 짓을!”

“아, 그거요. 아, 거 여간 난폭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리는 연놈들이라 어쩔 수가 없었습죠. 예.”

시에나는 잠시 고문관을 흘겨 보다 슈마트라 초이와 디에네 비노쉬를 치료해 주었다. 고문관은 피 자국이 없어질수록 안타까워하는 모습이었다. “제대로 준비시켜 나오세요. 의식이 곧 시작될 것입니다.”

“예. 예.”

시에나는 룸바르트와 고문관을 한심하다는 듯이 번갈아 쳐다보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힌 듯하자 고문관은 퉁퉁한 얼굴을 찌푸렸다.

“퉷, 저런 건방진 년.”

고문관은 창까지 따라가 시에나의 등을 노려보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죄인을 치료까지 하다니. 저 년이 듀스 마블님만 믿고 저렇게 기고만장하게 나오는데, 그냥 저런 계집은 뒷골목에서 한 번.”

“고문관.”

“예? 예?”

“난 어서 의식을 보고 싶네.”

“아이쿠! 그래야죠. 그래야죠! 이 연놈들을 매달아야죠!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이 몸이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크큭”

고문관은 신나게 슈마트라 초이와 디에네 비노쉬에게 명주옷을 입혀 나갔다.

“자, 자. 다 되었습니다.”

“그럼 가지.”

룸바르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자, 고문관은 서둘러 문을 열고 슈마트라 초이와 디에네 비노쉬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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