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 프롤로그
| 20.12.16 12:00 | 조회수: 2,465


잿빛 구름 사이로 두 개의 달이 얼음처럼 싸늘한 빛을 내쏘던 날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은 창을 든 손아귀를 아프도록 움켜쥐었고, 그 팽팽한 긴장감은 자기 키의 두 배가 넘는 기다란 창도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쿵쿵 둔중하게 울리는 발소리, 빽빽하게 늘어서 전진하는 머리 위에서 우줄우줄 움직이는 날카로운 창끝은 마치 커다란 숲이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선택한 신들과의 마지막 전쟁이었다.

무한한 권능으로 트리에스테 대륙을 지배하던 알로켄족.

그들의 야욕으로 인간들은 생존의 위기를 느꼈고 검과 창, 활과 지팡이를 들어야 했다.

천공의 광석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갑옷과 빛의 검으로 무장한 알로켄의 마검사들은 당당한 모습으로 신전을 지켰다.

인간들은 그 웅장한 모습에 움찔해 마른 침을 삼켰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었고 지금 이 순간에는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쳐야 했다.

"가자!"

"우와아아!"

병사들은 두 눈을 불끈 감고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신전을 향해 돌진했다.

"우와아아아아아! 알로켄을 죽여버리자!"

분노로 두려움을 덮어버린 병사들의 외침이 목젖을 뚫고 터져 나왔다.

예리하게 다듬은 창들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신전의 기둥을 한꺼번에 찔러대자, 육중한 기둥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대리석 부스러기들이 후두두 떨어졌다.

"으아아아!"

흥분한 병사들은 미친듯이 창을 찔러댔다. 빽빽하게 둘러서서 고슴도치처럼 창날을 세우고 알로켄들을 당황케 만들었다.

인간들은 당황하는 알로켄들의 모습에 드디어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이 솟았다. 희망은 더 큰 힘을 낳았고, 다음 공격의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가 이긴다! 인간들이 이기고야 말 것이다! 신전을 부수어라!"

엘리멘탈이 모여 있는 신전을 부순다면 알로켄은 마력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었고, 그러면 승리할 것이었다.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들이 기뻐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알로켄 마검사들은 빛이 나는 검을 들어 라이트닝 엘리멘터를 불러 들였다.

"라이트닝 마스터."

파아악.

잿빛 구름을 가르며 거대한 번개가 날아와 창으로 만든 숲 중앙에 꽂혔다.

소리에 놀란 병사들이 흩어지는 사이, 알로켄 마검사들은 푸른 광검을 휘두르며 창의 숲을 인간들의 피로 붉게 물들였다.

"이것이 너희 인간들에게 주는 마지막 은총이다!"

마력의 검에 휘말린 병사들이 비명을 질러대기도 전에 나약한 인간의 목이 땅에 떨어져 대굴대굴 굴렀다.

두려움에 휩싸인 병사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전세가 순식간에 역전되었지만 인간들에게는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탓할 시간이 없었다. 벌써 알로켄의 광검에서는 엘리멘터의 힘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물러서지 마라! 다시 전진하라!"

병사들은 다시금 치솟는 불안감을 애써 감추며 닥치는 대로 창을 찌르고 방패로 몸을 가렸다.

쩌어억 쩍 쩌억.

땅이 갈라지는 소리가 트리에스테 대륙 전체에 울렸다.

그러자 피를 뿌리며 난무하던 알로켄 마검사들이 하나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알로켄과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여 존재의 자유를 되찾고자 했던 인간들은 갑자기, 그것도 바로 눈앞에서 적이 사라지자 당황하여 혼란에 빠졌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알로켄들은 어디로 사라졌지?"

캬아아아악.

병사들이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트리에스테 대륙의 잿빛 하늘은 더욱 음산하게 어두워졌다. 시작을 알 수 없는, 고막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그 끝을 모르고 점점 높아졌다.

"무슨 소리야?"

"으아앗!"

"크억."

날카로운 소리는 바늘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주었고, 인간들은 비명을 지르며 땅을 굴렀다.

파괴가 생성을 끊어내듯 트리에스테의 대지가 끝없이 갈라졌다. 트리에스테 대륙의 땅이란 땅이 모두 다 터져버릴 듯이 꿈틀거렸다.

희망이나 절망 따위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천진한 어린 아이들이 후욱 숨을 멈추자,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이 돌무더기에 깔려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공기를 난도질했다. 알로켄과 싸우던 병사들도 갈라진 땅 밑으로 후르륵 떨어졌다.

숨 쉬는 인간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처참한 울음소리가 날카로운 고음에 섞여 트리에스테 대륙 전역에 울렸다.

그 사이 짙게 깔린 구름 사이로 파괴의 달 미세리아가 생성의 달 리케츠를 덮어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미세리아가 생성의 달 리케츠를 완전히 가리자, 대지의 흔들림이 멈추었다.

하지만 원인 모를 불안감이 인간들의 뇌리를 계속 때렸다. 아직 생명이 붙어 있는 인간들은 더 늦기 전에 방주 아르카나로 피신하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도망가야해……. 어서……. 도망가야해……."

불안정한 잔걸음들 아래 조용해진 땅 속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검은 연기가 어디로부터, 누구로부터 퍼져 나온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그 연기가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가져올 것이라는 직감이 나약한 인간들의 머리를 후려쳤다.

절대적인 악의 기운에 겁먹은 인간들은 서서히 땅을 잠식해가는 검은 연기에서 벗어나려고 아우성을 쳤다.

"저…… 저리가! 오지마!"

"으…… 으…… 으악!"

꾸엑……. 꾸엑……. 꾸웨엑…….

자욱하게 뒤덮인 검은 연기는 아우성치는 인간들을 하나씩 하나씩 서서히 삼켜 나갔다.

뱀이 먹잇감을 칭칭 동여가듯 조여드는 연기에 쥐어 짜인 연약한 몸뚱이에서는 선홍색 피가 좌르륵 좌르륵 흘러내렸고, 핏빛과 뒤섞긴 연기는 검고 붉게 출렁이며 비명소리와 함께 넘실넘실 춤을 추었다.

회색 망토를 겹겹이 휘감은 칼리지오 밧슈는 인간들을 삼키고 있는 검붉은 연기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검붉은 연기는 감히 칼리지오 밧슈를 삼켜버리지는 못하는지 섣불리 다가오지 않았다.

'놈이 나타났군…….'

칼리지오 밧슈는 방주 아르카나에서 인간들과 함께 초조하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비나엘르 파라이를 잠시 떠올렸다.

"휴우……."

깊은 숨을 크게 내쉰 칼리지오 밧슈는 드디어 결심한 듯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알로켄의 언어가 칼리지오 밧슈의 입에서 낮게 울려나왔다.

"생명의 파괴자여. 들어라. 이 트리에스테 대륙에는 더 이상 그대에게 허락될 시간이 없도다, 그대는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그러자 인간은 해석할 수 없는, 심장을 얼리는 굉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신의 말을 빌어 울리는 자여……. 내가 이 시간, 이 곳에 있는 것은 "현재"의 계약에 의한 것……. 그 계약에 따라 '현재'와 "과거"가 이어져 이계의 것이 되었으니……. 이제 내가 '본래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 트리에스테가 되었노라."

칼리지오 밧슈는 품 안에서 '성스러운 물약'을 꺼내 은빛 검에 뿌린 뒤, 검붉은 연기로 자욱한 곳에 은빛 검을 깊숙이 박으며 말했다.

"천만에! 트리에스테는 이계의 것이 아니다!"

은검이 쿠욱 땅을 찌르는 소리와 인간의 언어가 뒤섞여 대지를 뒤흔들었다.

쉐엑 쉐엑-.

그러자 은빛 검이 박힌 자리를 넘실거리던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땅 밑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마음 속 깊은 곳, 두려움의 심연을 건드리는 듯한 굉음이 다시 높게 울렸다.

"나를 방해하는 자. 끝 없는 어둠에 갇히게 되리라!"

그 울림소리를 따라 검은 광풍이 칼리지오 밧슈에게 회오리처럼 불어 닥쳤다. 칼리지오 밧슈는 물러서지 않고 단단히 잡은 은검에 마법의 힘을 주었다. 검에서는 새하얀 광채가 눈부시게 뿜어져 나왔다.

'드디어 시작이군…….'

싸울 준비를 마친 칼리지오 밧슈가 결연한 얼굴로 크게 외쳤다.

"오너라! 모든 생명의 파괴자 카론이여! 내 앞에 너의 그 치졸한 모습을 어서 보여라! 방주 아르카나를 지키기 위해! 나와 같은 피를 나누고 있는 인간들을 위해! 그리고 알로켄과 인간의 중간자인 나 자신을 위해!"

칼리지오 밧슈는 은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이 칼리지오 밧슈가 오늘 너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리라!"

사방으로 흩어져 하늘과 땅을 가득 메우던 검은 연기가 한데로 모여 들더니, 마력이 뿜어져 나오는 은검을 겨누고 우뚝 서 있는 칼리지오 밧슈의 깊고 짙은 남색 눈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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