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io - 의식 - 15장. Rouen. 심판의 광장
| 20.12.30 12:00 | 조회수: 1,044


단상을 향해 돌진하는 기사들의 갑옷과 검은 모두 회색이었지만 가슴과 투구의 문장은 조금씩 달랐다. 잔바크 그레이는 유수의 기사단 중 비교적 우호적인 단체들에서 선별한 기사들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이것저것 섞어서 몰고 왔군. 조잡한 것들 같으니라고.’

듀스 마블은 제노아의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엘리멘터들이여! 나와 함께 진홍빛 나락을 지금 이곳에 집중케 하라! 세라피 플레어!”

듀스 마블의 얼굴에서 핏줄이 붉고 푸르게 솟아오르고 식은 땀이 흘렀다. 스켈리톤을 불러 낸 상태에서 또 다른 마법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듀스 마블의 정신력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소모되고 있었다.

때문에 땅밑으로부터 불러낸 불덩이들이 툭툭 솟아나와 기사들을 후려치자 듀스 마블은 시에나를 향해 외쳤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어서 저자들을 상대하지 않고! 인카르의 사제단이면 이럴 때 실력을 발휘해야 할 것 아니냐!”

힘을 더 소진하기 전에 방어막을 세우려는 듀스 마블과 함께 잔바크 그레이도 부랴부랴 외쳤다.

“다들 떨어져! 발 아래를 조심해!”

잔바크 그레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불덩이 하나가 코를 스칠 듯 지나쳤다.

“후우.”

주위를 둘러보자 모두들 비슷한 상황이었다. 불덩이를 피하고, 또 피하느라고 쉽게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잔바크 그레이의 표정은 미소로 바뀌었다.

“역시.”

잔바크 그레이는 칸처럼 불덩이를 칼로 쳐내며 옆으로 이동했다.

“잔바크!”

“칸은 역시 대단하군. 파그노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야.”

칸은 얼굴을 붉히며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불덩이는 끊임없이 날아들고 지나쳐갔다. 땅 속으로 들어가는 듯 하다가도 다시 튀어 올랐다.

“날 좀 도와줘. 이대로는 듀스 마블을 막지 못해. 주위에서 불덩이를 좀 막아주겠어?”

잔바크 그레이의 말에 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하지만 잔바크 그레이와 칸은 두 세 걸음도 더 움직이지 못하고 멈추어 버렸다. 검에 부딪혀 튀어나가던 불덩이들이 어느새 폭발하고 있었다.

“우웃. 무슨 일이야! 왜 갑자기 터지지?”

“불덩이가 터지고 있어요! 불덩이가 터지고 있다구요!”

당황한 잔바크 그레이와 칸의 앞에 한 무리가 나타났다. 작지만 두려운 웅얼거림이 점점 커졌다.

“달빛의 여신 큔에게 발화의 힘을 빌리니, 엘리멘터들이여 우리와 함께 꽃처럼 아름답고 칼날보다 날카로운 그대들의 놀라운 힘을”

“가만, 이거 어디서 들어본 소린데?”

“이거……. 아까…… 아까…… 아까!”

“피해!”

“지금 이곳에 집중케 하라! 플레어 비트!”

수백 개의 불덩이가 공중으로부터 쏟아져 내렸다. 공중에서 쏟아지는 불덩이와 땅에서 튀어 오르는 불덩이가 기사들을 납작하게 뭉개버리기 위해 속도를 질렀다.

시에나는 불덩이가 작열한 연기 사이로 기사들의 상황을 구석구석 관찰하였다.

“효과가 있는 것 같군요.”

시에나와 같은 주홍색 오클라스를 입은 사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인카르의 사제단이자, 인카르의 전령이었다. 원래 조디악 바로 밑에는 대사제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헬리시타의 여러 지역을 분할해 맡으면서 신전에 남은 인카르의 사제단의 역할과 규모는 점차로 커졌다. 헬리시타를 제외한 트리에스테 대륙 전체의 일을 그들이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의 주 역할은 듀스 마블과 같은 조디악들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지금 시에나와 인카르의 사제단은 그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다.

시에나는 다시금 일어서는 잔바크 그레이를 확인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한 번 더 해야겠어요.”

시에나와 같은 주홍색 오클라스를 입은 사제들은 다시금 정신력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루앙 광장을 향하는 인파에 휩싸여 헬리시타의 광장까지 떠밀려온 아이언 테라클은 일단 인카르 신전으로 몸을 피했다. 어지럽게 들뜬 인카르 신전 앞의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광기에 노출 되면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옴짝달싹 못할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몸을 사리고 인카르 신전에 숨어 든 아이언 테라클은 사죄의식을 치를 광장과 헬리시타 외곽까지 모조리 볼 수 있도록 인카르 신전 꼭대기까지 성큼성큼 올라갔다. 잔바크 그레이가 약속을 지켰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아. 하아.”

희뿌옇게 멀리 보이는 헬리시타의 외곽은 먼지로 가득해 보였다. 진득하지 않은 잔바크 그레이의 성격을 짐작했을 때, 아이언 테라클은 잔바크 그레이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저 놈의 급한 성격이 도움이 될 때가 있군. 하아. ”

평소 같으면 진중하지 못한 잔바크 그레이의 모습에 화를 버럭 냈을 아이언 테라클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잔바크 그레이가 그 빠른 성격만큼 빨리 중앙 광장까지 왔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숨을 고른 아이언 테라클은 제노아의 기사들을 기다리며 핏덩이가 가득한 사죄의식에 열중했다. 슈마트라 초이의 팔을 잘라낼 때에는 듀스 마블의 잔인함에 혀를 내둘렀고 클로비스가 나섰을 때는 자신도 온 몸이 마비되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리고 제노아의 기사들이 광장에 등장했을 때는 온 몸에 짜릿한 희열이 타고 흘렀다.

“됐어. 이제 됐어!”

아이언 테라클은 이제 헬리시타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하지만 기사들의 등장에 기뻐했던 것도 잠시, 제노아 군은 북방의 기사라는 말이 무성하게 자욱한 연기에 묻혀 인카르의 사제단에게 꼼짝없이 당하고 있었다.

“멍청한 놈들!”

아이언 테라클은 어렵게 결정한 기회를 버릴 수가 없었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요란하게 계단을 두 세 개씩 뛰어 내려갔다.

듀스 마블은 위아래로 쏟아지는 불덩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제노아의 기사들을 만족스럽게 보고는 몸을 휙 돌려 단상 위로 올라갔다.

“가소로운 것들.”

처음에 불러냈던 스켈리톤들은 클로비스의 보호막을 거의 다 부수고 있었다.

“네 놈 목숨도 별로 남지 않았구나.”

듀스 마블은 킥 웃어버리고 슈마트라 초이를 향해 섰다. 공중에 떠 있듯 정지한 은검을 꾹 쥐었다.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는 공기마저도 멈추게 할 것 같았다.

“네 놈은. 나를 위해서나 이 트리에스테 대륙을 위해서나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듀스 마블은 엄숙한 자세로 검을 세웠다.

“이제 내가 숨통을 끊어주마!”

듀스 마블은 은검을 들어 올렸다. 슈마트라 초이를 확실하게 반으로 갈라주고 싶었다.

‘이 검을 그대로 내리기만 하면 돼! 그러면 되는 거야!’

휘익.

듀스 마블은 슈마트라 초이의 정수리를 향해 그대로 검을 내리 그었다. 듀스 마블이 어찌나 집중했는지 검에서 바람이 일 정도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카앙.

“어억!”

듀스 마블의 얇은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뭐, 뭐야? 이게 뭐야!”

듀스 마블의 눈이 믿고 싶지 않은 듯 옆으로 움직이길 거부했다. 하지만 듀스 마블은 무슨 일이 생겼는지 확인해야 했다.

“저건?”

피비린내가 자욱한 단상에 은검의 날이 꽂혀 있었다. 그 날을 듀스 마블이 들고 있는 은검 끝에 붙이면 정확히 들어맞을 것 같았다.

듀스 마블은 오른쪽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놈!”

아이언 테라클은 듀스 마블을 무시하고 망토 안에서 검 하나를 더 꺼내며 광장을 향해 소리쳤다.

“제노아의 기사들아!”

자기 몸집 만한 검을 날려 듀스 마블의 검을 잘라 낸 아이언 테라클은 제노아의 기사들을 향해 고함을 버럭버럭 질렀다. 평소 뒤로만 숨었던 아이언 테라클과 너무도 판이한 모습이었다.

“이 병신들아! 너희들이 없애야 할 놈은, 저기 듀스 마블이란 말이다!”

아이언 테라클은 이어서 기름을 띄운 얼굴로 듀스 마블을 바라 보았다.

“어서 마법을 부려야지? 응? 써보지 그래? 크크. 이봐. 듀스, 내가 자네 마음을 알아. 지금 얼마나 마법을 쓰고 싶을지. 근데…. 자네는 이미 힘을 많이 소진했지? 흑마술이란 그런 것 이잖은가. 크큭.”

듀스 마블은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언 테라클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게. 마법에만 열중하지 말고, 나처럼 아모르님께 검술을 잘 배워뒀어야지. 안 그래? 뭐, 실력이 안되면. 순순히 헬리시타를 기사들에게 넘기고. 크크”

“뭐라고?”

“자네가 날 상대할 수 없는 건 너무도 자명한 사실 아닌가? 방 구석에 처박혀 주술 나부랭이만 지껄인 자네와 직접 무기를 만드는 대장장이. 둘 중에 누가 더 검을 잘 쓰겠는가?”

듀스 마블은 검으로는 아이언 테라클을 상대할 수 없음을 깨닫고 뒤로 물러섰다. 대장간 주인이라고 괄시 받아 온 아이언 테라클이었지만, 역시 그도 연륜 있는 기사였다.

“자! 어서 무릎을 꿇게!”

마음이 조급해지자 듀스 마블은 가까이 있던 사제단을 향해 외쳤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지금 헬리시타에 적이 침입했어! 이 기사 놈들을 봐! 인카르를 무너뜨리려고 온 거야!”

하지만 듀스 마블의 말에 돌아본 것은 시에나 뿐이었다.

“우리 기사들은? 청기사들은 다 어디 있어? 어서 크루어를 들고 나와서 싸우란 말이야! 맹세 했잖아! 어서 나와! 아이언 테라클과 저 떼거지들을 베어 버리라구!”

듀스 마블의 주위는 여전히 고요했다. 슈마트라 초이를 사죄의식에 처함에도 인카르 교단에 맹세한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루앙 광장에 자리했던 청기사들은 클로비스의 마법으로 정지한 채였다. 듀스 마블을 도울 기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당신들 뭐야! 어서 나와! 어서 나와서! 나와서 싸우라고! 이렇게 끝낼 건가!”

듀스 마블은 다시 또 조디악들에게 소리쳤지만, 그들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나서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 보던 듀스 마블은 분을 삭히지 못했다.

“이, 이. 이 모자란 것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너희들은 인카르의 조디악이잖아! ”

보다 못한 조디악 중 하나가 손가락을 들어 광장 입구를 가리켰다. 그의 눈은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뭐야!”

듀스 마블의 눈알이 터져나올 듯이 꿈틀거렸다. 그곳에 말보다 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하고 있었다. 듀스 마블은 잘려진 은검을 놓치며 뒤로 휘청거렸다.

“어억! 비…… 비나엘르!”

“듀스 마블! 가만두지 않겠다!”

놀라는 듀스 마블을 향해 가리온이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중앙을 가로질러 나가는 가리온의 시야에 위아래로 솟구쳐 대는 불덩이 같은 것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피로 얼룩져 얼굴을 알아보기도 힘든, 두 팔이 잘려나간 곳이 구슬프게 요동치는 아버지의 모습이 오직 가리온의 눈물샘에 차오르고 있었다.

“아버지!”

가리온은 크루어와 함께 높이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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