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비는 헬리시타를 춥게 만들었다.
서늘한 밤의 빗소리가 슬프고 차가웠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오로지 밤 비 때문만이라고도 할 수는 없었다.
겨드랑이와 가랑이 사이로 파고드는 한기는 또 있었다.
그것은 끝나지 않는 싸움에서 오는 공포였다.
무엇을 노리고 오는 것인지, 헬리시타 성벽을 넘은 오염체들이 끝도 없이 밀어닥쳤다.
제노아의 기사들과 세지타족, 소수의 마법사들이 맨 앞에서 루앙 광장을 지키고 있었지만, 밀려드는 오염체들을 몰아내기에는 숫자가 너무도 부족했다.
그래도 헬리시타를 지켜야 했다.
헬리시타는 고향이고, 삶의 터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광장에 고립된 사람들은 뒤로 도망칠 곳이 없었다.
어른이건 아이건 누구든지 싸울 수 있는 한은 싸워야 했다.
그렇게 가장 길었던 하루의 밤은 지나가고 있었다.
가리온은 자고 일어난 듯 눈을 비볐다.
몸의 근육이 굳은 것처럼 찌뿌드드했지만, 이리저리 몇 번 뒤척거리자 곧 개운해졌다.
가리온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 봤다.
해가 지고 달이 뜬 헬리시타의 하늘이 별나라에 온 것처럼 또렷했다.
“내가 왜 쓰러져 있지?”
부었던 얼굴은 깨끗하게 돌아와 있었다. 팔꿈치도 원래대로였다.
방금 전까지 회오리가 날아다녔다는 것이 마치 꿈결에서 있었던 일 같았다.
“그래…. 환상이었어…. 모두….”
가만히 중얼거렸다.
하늘 아래 달 하나, 자신 하나, 그리고 크루어 하나.
그뿐, 다른 것은 없다는 마음이었다.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가 위험했던 일도 모두 백일몽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시에나를 찌른 일도 거짓인 것 같았다.
그 생각은 확신마저 들게 했다.
“강한, 아버지가. 그럴 리가 없잖아…. 시에나는 못 본지도 오래 되었고….”
가리온은 쓸쓸하게 웃었다.
사방이 고요하고 쓸쓸했다.
가리온의 눈이 젖었다.
어색한 눈물이 눈끝에서 관자놀이를 향해 흘렀다.
가리온의 머리 속에, 단상 위에서 벌어진 일들이 순서대로 지나갔다. 사실과 진실은 아무리 덮으려 해도 더욱 강하게 떠오르는 법이었다.
“아버지….”
가리온은 한동안 멍하니 누워 있었다.
밤은 낮만큼이나 길었다.
가리온은 한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휴우.”
그러나 일어서자마자 막막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죽은 시체들이 인카르 신들의 동상 주위로 빼곡히 들어 차 있는 잔인한 살풍경이 가리온을 맞이했다.
“대체….”
가리온은 기막힌 상황에 할말을 잃었다.
찾고, 볼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참혹한 비극뿐이었다.
가리온은 일어서서 단상을 내려갔다. 터벅터벅 희망을 잃어버린 발소리는 루앙광장의 아수라장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들리게 했다.
루앙 광장 끝에는 도망가기를 포기한 사람, 그들을 밟고서라도 살려고 뛰어가는 사람, 그 둘 사이에서 정신 차리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눈을 떨어뜨렸는지 감았는지, 정신 없이 부딪혔다.
단상 아래는, 위에서 본 것보다도 더욱 잔인한 빛을 띠고 있었다. 괴상한 그림처럼, 일정하지 않은 형태의 색깔을 마구 섞은 듯한 시체들이 잔물결을 치고 있었다.
“아!”
가리온은 가슴 아픈 탄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속을 게워내야 풀릴 것 같은 역겨움이 심장을 치고 올라왔지만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슈마트라 초이의 모습을 잡기 위해 가리온은 부단히 고개를 기웃거리고 움직였다.
마침내 익은 얼굴 하나가 가리온의 눈에 들어왔다.
시체들 사이에 있는 그 얼굴은 가리온이 여신일거라 생각해 왔던 그 사람의 얼굴이었다. 가리온은 그 얼굴을 보자마자 얼이 빠지는 것 같았다. 울컥한 마음과 함께 이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가리온은 얼굴을 돌려보려 했다. 하지만 눈은 뗄 수가 없었다. 그 얼굴에서 도저히 눈동자를 비켜갈 수가 없었다.
“아아!”
주체할 수 없는 좌절감에 가리온은 몇 번이나 나뒹구는 시체들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아아!”
검게 식은 얼굴이 곧 손에 닿을 것 같았다. 가리온은 손을 떨며 앞으로 내밀었다.
조금 더, 조금 더. 앞으로 내밀었다.
차가운 얼굴이 손에 닿을 때까지 조금씩 앞으로 내밀었다.
“아아아!”
가리온은 주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 손은 여전히 떨렸다. 두 볼을 검지로 눌러보았지만 온기도 전혀 없고 딱딱할 뿐이었다. 말라붙은 입술은 하얗게 식었고, 퍼렇게 부은 상처투성이 눈은 애처로웠다.
“어머니…! 아아!”
지금의 루앙 광장만큼이나, 디에네 비노쉬의 죽음은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가리온은 디에네 비노쉬의 얼굴을 매만지고 또 매만졌다.
“어머니! 뭐라고 말 좀 해보십시오!”
가리온의 뜨거운 눈물이 디에네 비노쉬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서러운 곡 소리가 주위에 울렸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루앙 광장을 내려다 보았다.
짐승이 사납게 우는 소리와 창이 부딪히는 소리가 간간히 예민해진 귀를 건드렸다.
“후우….”
비나엘르 파라이로서는 아주 드문 한숨 소리였다.
“고맙게 생각해.”
비나엘르 파라이는 창에서 떨어져 뒤를 돌아 보았다.
“오늘. 듀스의 일과 디에네 비노쉬의 일, 그리고 지금 밖에서 돕고 있는 것도.”
“제가 시킨 게 아닙니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래. 그렇겠지. 자네는 그렇게 다정하지는 않지.”
비나엘르 파라이는 화내지 않았다.
“그래도, 고맙게 생각해.”
“디에네 비노쉬가 이렇게 된 건 당신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어째서냐구요? 그건!"
대륙에서 냉정한 것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아이리스 비노쉬는 냉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디에네 비노쉬를 잃은 것은 아이리스 비노쉬에게는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검성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
“듀스 마블의 이야기입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약간 고개를 기우뚱했다.
“비나엘르 파라이님께서는 듀스 마블을 너무 두둔하셨습니다!”
“아이리스. 자네가 디에네 비노쉬를 얼마나 기특히 여겼는지 잘 알아. 그렇다면 간수를 더 잘 했어야지.”
아이리스 비노쉬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비나엘르 파라이님!”
“디에네 비노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야.”
비나엘르 파라이는 다시 창 밖을 내다 보았다.
“다만,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돼. 또 자네가 계속 날 도와야 한다는 것도.”
비나엘르 파라이의 목소리에는 묘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우리는 크레스포로 가야 해.”
아이리스 비노쉬는 크레스포란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날 도와줘. 지금처럼. 자네가 할 일은 그거야.”
비나엘르 파라이는 기분 좋게 대답했다.
“그래…. 데카론이야.”
“데카론?”
“지금, 이 밤부터 데카론이 시작되는 거야!”
비나엘르 파라이는 더 이상 아이리스 비노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둘은 안돼…. 하나가 더 있어야 해.”
그리고는 같은 구절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세계의 자아는 본래 하나이니, 뒤섞인 핏줄이 가장 탐욕스러운 뿌리를 구할지어다…. 세계의 자아는 본래 하나이니, 뒤섞인 핏줄이 가장 탐욕스러운 뿌리를 구할지어다….”
“도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나는 이제부터, 내게 있어 가장 큰 욕심을 부릴 것이다. 탐욕스러운 뿌리처럼!”
아이리스 비노쉬는 비나엘르 파라이를 이상하게 쳐다 보았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창에 바짝 붙었다.
“자, 가리온…. 어디에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