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네.”
쿠리오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번은…. 안 되겠네.”
“네?”
“다른 의사를 찾아보게.”
헤이치 페드론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룸바르트도 쿠리오의 어깨를 덥석 끌어안더니 헤이치 페드론을 따라 갔다.
“말도 안돼….”
쿠리오는 고개를 젓다가 눈을 들었다. 의사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인카르 교단에서 쫓겨났을 때보다도 더욱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기적처럼 만난 의사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이제…. 죽음뿐인가…. 아무것도…. 없는가…?’
온 몸의 힘이 쑤욱 빠져버렸다.
“당신 때문이에요.”
가늘고 높은 소리가 갑자기 들렸다.
“당신은 그를 그냥 데려가야 했어요.”
쿠리오는 주위를 둘러 보였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것 같았다. 묘한 여운을 주는 목소리였다.
“누구시오?”
쿠리오는 용기를 내어 말해보았다.
“하지만 어차피 그를 데려갔어도 당신은 살 수 없었을 거예요.”
끝소리에 번져 오는 웃음소리가 쿠리오를 감싸는 것 같았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황홀하면서도 이 소리에 홀리는 순간 피를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두려운 쾌감이 온 몸 구석구석 퍼졌다.
“그는 시에나를 살릴 수 없으니까요.”
“누구야?”
쿠리오는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래도 당신은 운이 좋은 편이에요.”
목소리의 채찍은 쿠리오를 더 세게 죄었다. 이제는 더 이상 황홀하지 않았다. 근육을 마비시키는 듯한 고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정말로, 당신은 운이 좋은 거예요.”
몸을 죄는 형체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쿠리오의 온몸에서 피가 조금씩 짜여 나왔다. 쿠리오는 피를 보고 놀랄 겨를도 없이, 목 뒤로 차가운 숨결이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수고비로 받아 가겠어요.”
숨결은 쿠리오의 피를 쓸어갔다.
“내가 시에나를 살릴 테니까.”
긴 손가락이 쿠리오의 어깨를 따라 팔을 쓸어갔다.
“이제 길을 안내해요.”
그렇지만 쿠리오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난 타마라예요. 이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치료자죠. 날 믿는 게 좋을 거예요.”
높고 가는 목소리가 다시 황홀하게 퍼졌다.
쿠리오는 타마라를 캄비라 바투와 시에나에게로 이끌기 시작했다. 피를 빼앗겼는데도 전에 없이 황홀한 기분이 쿠리오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타마라도 기분이 좋은 듯 조금씩 흥얼거렸다. 가락을 따라갈 수 없는 그 노래는 시끄러운 듯 하면서도 자꾸만 빠지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쿠리오도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진홍색 피가 살을 뚫고 솟아올랐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쿠리오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쿠리오와 타마라가 바기족 전사들이 있는 곳에 도착할 즈음, 노래 소리는 멎었다.
더 이상의 황홀함은 없었고 피를 잃은 쓰라린 고통만이 남았다.
“끄으.”
쿠리오는 미소 짓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앞의 악마를 드디어 제 정신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타마라는 검고 볼록한 작은 입술과 검은 손톱을 가지고 있었다. 손톱은 손가락 마디가 하나 더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길었다. 피부색은 몹시도 괴기스러웠는데, 쿠리오는 붉으면서도 서늘하게 푸르다고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타마라는 쿠리오가 좀 더 자신을 훑을 수 있게 두는 것 같았다. 쿠리오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도 계속 미소만 지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입술 위로는 작은 코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코 위에는 인간처럼 눈이 짝으로 있었다. 눈동자는 보기 힘든 황금빛이었다.
꽉 짜인 턱 선은 큰 눈과 작은 코와 입을 훌륭하게 감쌌다. 그 작은 얼굴을 감싸고 올라가는 귀는 하늘로 높게 치솟았고, 뒤로 날카롭고 길게 뻗은 머리는 날카로운 뿔처럼 아찔했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타마라를 훑으며 쿠리오가 말했다.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자덴뿐 아니라 트리에스테 대륙 전체에 미신이나 전설처럼 떠도는 소문이었다.
그들이 언제부터 대륙에 나타났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리 반가운 손님은 아니었다. 한없이 강하고, 피에 굶주린 그들은 대륙을 종횡무진 하면서 살인을 일삼았고, 그 후에는 꼭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이 타마라의 온 몸에 새겨져 있었다. 온 몸을 덮은 문양은 이계의 사슬로도 보이고, 감히 범하지 못하도록 만든 족쇄 같은 위압감도 주었다.
“당신은 세그날레, 입니까?”
쿠리오는 고심 끝에 물었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나를 죽일, 겁니까?”
“하하하하하.”
타마라는 마구 웃었다.
“세그날레는, 아무나. 죽이지 않아요.”
그 말에 쿠리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바이스의 기운을 가진 자여.”
타마라는 싸늘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대의 피는 이미 맛봤어.”
쿠리오는 피부를 덮고 있는 모든 것이 쭈볏 쭈볏 일어서는 것 같았다.
“그러니 큰 걱정 말고 나를 안내해요.”
타마라는 쿠리오의 모습을 즐기듯 말했다.
바기족들도 타마라를 보는 순간 쿠리오 같은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캄비라 바투는 타마라를 믿지 않고 시에나를 내놓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타마라는 들어주는 척도 하지 않고, 단 한 마디를 말했다.
“구원.”
그 한 마디에 시에나의 얼굴색이 갑자기 환해졌다. 온기가 스며드는 듯한 따스함이 덧씌워지고 있었다.
“뭐, 뭐야.”
그래도 바기족들은 타마라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이, 우리를 속이려고!”
바기족 전사들은 도끼를 들고 타마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타마라는 몹시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살고싶다면 그만들 하시죠. 그 분은. 시에나 오틴을 구하라는 말씀만 하셨어요. 전 분명히 그 약속을 지켰구요.”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내가 당신들을 해치지 말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죠.”
“뭐라구?”
타마라는 차갑게 웃고는 검은 손톱을 들었다.
“피의 역류.”
타마라는 짧게 말했을 뿐이었지만, 낮은 중저음이 계속 흘러나왔다. 그것은 지옥에서나 들을 수 있는 소리 같았다. 가슴 속 깊은 마음을 계속 거북하게 만들었다.
바기족 전사들은 울컥하고 혈관이 거꾸로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우웩.”
전사들은 도끼를 든 채로 묽은 액체를 뱉어냈다. 구토는 멈추지 않았다. 묽은 액체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오더니 붉은색으로 변하였다. 땅에 떨어진 붉은 피는 뜨거운 증기처럼 연기가 되었다. 탈수 증상에 전사들은 철퍽 쓰러졌다.
캄비라 바투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캄비라 바투도 거의 쓰러지기 일부 직전이었다.
“이! 잔인한!”
“고마워요.”
타마라가 생긋 웃었다.
“여기까지만 하죠. 당신들과 쿠리오가 시에나를 보살펴야 하니까.”
쿠리오는 바기족 전사들의 모습을 보며 다리를 오므리고 덜덜 떨었다.
무사한 것은 시에나와 자신뿐이었다. 쿠리오는 넘어서지 못할 두려움으로 얼이 빠져 있었다.
“쿠리오.”
타마라는 그런 쿠리오를 황홀한 목소리로 불렀지만, 더 이상 그것은 황홀한 것이 아니었다.
“쿠리오. 나는 약속대로 당신을 해치지 않았어요. 그러니 당신은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거예요.”
쿠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마라가 무슨 말을 하던 다 따를 생각이었다.
“지금부터 당신은 시에나를 지켜야 해요. 시에나에게 헬리시타는 적합한 곳이 아니니 자덴으로 가세요. 바기족 전사들 틈에서라면 시에나는 잘 회복할 수 있을 거예요.”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내가 시에나를 데려갈 것이다!”
캄비라 바투가 외쳤지만, 타마라는 여전히 무시했다.
“시에나를 자덴에 데려가면 12일 동안 독방에 가두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열어서는 안 되요.”
쿠리오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시에나의 치료가 끝나면, 곧바로 크레스포로 출발하세요.”
“….”
“인카르 교단으로 가서는 안돼요. 반드시 크레스포로 와야 해요.”
“…?”
“시에나를 인카르 교단으로 데려가면 당신이 꿈꾸는 것들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거예요. 내 말을 명심해요.”
“……네.”
쿠리오는 이제 대답까지 했다. 타마라는 미소를 지어 주었다.
“좋아요. 내가 당신에게 힘을 주겠어요.
타마라의 손에는 어느 새 작은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이것으로 당신은 큰 힘을 얻게 되고,”
타마라는 힐끗 캄비라 바투를 응시했다.
“당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겠죠.”
타마라의 양 귀가 기분 좋은 듯 흔들거렸다.
“그것을 무엇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겠어요. 다만,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해요.”
쿠리오는 끄덕이며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것만 지켜요.”
쿠리오는 끄덕였다. 타마라가 자리를 뜨고, 바기족 전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쿠리오에게 다가 올 때까지 계속 끄덕였다. 넋이 나가버린 듯 끄덕였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만큼 큰 힘….’
쿠리오는 주머니를 든 손을 꼭 쥐었다.
타마라는 멀리서 일어서는 바기족 일행을 응시했다.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는 힘이라…. 그런 게 과연 있을까?”
타마라의 목소리 뒤로 소름 돋을 듯,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여운처럼 퍼졌다.
파동 속에 몸을 실은 타마라는 헬리시타로 향하려 했다.
“자, 오늘도 공을 쌓았으니. 보고를 해야지.”
“타마라.”
“…!”
“타마라.”
타마라는 멈칫 섰다. 여유롭던 표정이 긴장감으로 날카롭게 돌변했다. 타마라는 턱을 잡아 끌고 주위를 세심하게 살폈다.
“타마라.”
“타마라.”
“타마라.”
타마라의 파동보다도 더 강렬한 여운이 타마라의 몸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